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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황금알 이메일 color-box@hanmail.net
작성일 11.05.06 조회수 19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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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겨레 - 김영석 시집(거울 속 모래나라)
한겨레 2011.03.11 (금)

시와 산문이 공존하는 ‘사설시’ 열두편
거울 속 모래나라
김영석 지음/황금알·9000원
김영석 교수 이색적 시집
역사·신화·개인사 소재로
배경 이야기에 시 덧붙여


최재봉 기자


중견 시인 김영석(66·배재대 국문과 교수)은 1970년 등단 이후 고작 네 권의 시집을 냈을 뿐이다. 무려 등단 22년 만인 1992년에 펴낸 첫 시집 <썩지 않는 슬픔>에서부터 2007년에 낸 <외눈이 마을 그 짐승>까지. 새롭게 나온 그의 시집 <거울 속 모래나라>는 그간 냈던 시집들에 실린 작품들 중에서 ‘사설시’(辭說詩)만을 골라 따로 묶은 선집이다. 미발표작 <아무도 없느냐>를 포함해 열두 편이 새집을 얻었다.


? 거울 속 모래나라 김영석 지음/황금알·9000원



‘사설시’란 김 교수 자신이 창안한 용어. “산문으로 된 이야기를 배경으로 두고 쓴 시로서, 시와 산문이 하나의 구조로 결합되면서 좀 더 높은 수준의 새로운 시적 영역이 열릴 수 있도록 시도해 본 것이다.”(‘시인의 말’)

가령 <지리산에서>라는 작품은 화자가 동료들과 함께 지리산 등반에 나섰다가 백골 한 구를 목격한 이야기에서 빚어졌다. 전선줄로 가슴과 손목께가 묶인 채 발견된 백골의 정체를 두고 동료들 사이에 빨갱이다 군경이다 아니 죄 없는 농투성이다 분분한 의견이 오가는 모습을 산문으로 풀어 쓴 뒤 시가 이어진다.

“이제 사슬의 고요 그늘진/ 우리들의 손바닥 위에/ 남북을 지우며 눈이 내린다/ 아득히 내리는 눈발 너머/ 등 굽은 어머니의 한 사발 정한수에/ 지리산이 갈앉고/ 한 사발의 하늘 위로 소리 없이 떠가는/ 기러기 한 줄/ 그 투명한 끝을/ 어디선가 아버지가/ 한사코 잡아당기고 있다.”

사설시의 소재와 대상은 다채롭다. 역사적 사실과 인물이 등장하는가 하면 신화나 설화적 세계를 다루기도 하고 철학적 우화 형식을 취하는가 하면 시인 자신의 개인사에서 소재를 가져오기도 한다. <포탄과 종소리>는 시인이 열일곱 살 무렵 변산반도 건너 하섬에서 지낼 때 그곳 원불교 시설 마당가 대추나무에 매달린 포탄 껍데기 종을 목격한 일을 산문으로 소개한 다음 이런 시로 이어진다.

“대추나무에 포탄 종을 걸어 놓은 까닭은/ 이제는 포탄과 종이 하나가 되어/ 하늘 끝까지 땅 끝까지 울리라는 뜻이네/ 잘 익은 대추가 탕약 속에서/ 갖은 약재를 하나로 중화시켜/ 생명을 살려내고 북돋우듯이/ 대추나무 포탄 종을 울리라는 뜻이네/ 천지는 나의 밥이고/ 나는 또한 천지의 밥이니/ 쉼 없이 생육하고 생육하라는 뜻이네”

산문이 끝나고 시가 시작되기 전에 시인은 “이러매 내가 노래한다”는 구절을 삽입했는데, 이 시 말고 다른 여러 시들에서도 볼 수 있는 이런 장치는 <삼국유사>의 지은이 일연이 역시 산문과 운문 사이에 흔히 넣곤 했던 “이에 찬한다”(讚曰)는 구절을 떠오르게 한다.

“제가 번역하기도 했던 <삼국유사>뿐만 아니라 동양과 서양의 옛 문헌들에서는 운문과 산문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장르가 지금처럼 엄격하게 분화되기 전에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우리네 전통 소리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소리꾼들이 노래를 부르기 전에 반드시 사설을 앞세우거든요.”

<그 짐승>은 사람 눈에만 보이고 짐승들 눈에는 보이지 않으며 한 번 그 모습을 본 사람은 남들과 소통이 되지 않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언둔갑(言遁甲)이’가 되고 만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이 작품의 뒤쪽 운문부는 말에 들린 시인 자신의 운명에 대한 짙은 회한을 노래한다.
“어찌하여 나는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말의 창틀로 세상을 내다보기 시작했던가/ 촘촘한 말의 그물에 갇혀/ 평생을 청맹과니로 떠돌아야 했던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 모두가/ 스스로 번식하는 저 말의 그물조차/ 그 짐승의 꿈같은 장난이었고/ 나 또한 그 짐승의 충직한 노예였구나”

그런가 하면 9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한 <길에 갇혀서>라는 작품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해직교사 복직 촉구 신문 광고가 촉매가 되어 30여 년 전인 1961년 여름으로 시간을 거슬러오른다. 시인은 당시 고등학생들 사이 폭력사건으로 체포되어 경찰서 감방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그 방에 자신을 가르치던 선생님들이 교원노조 가담 혐의로 들어오게 되었던 것. 그로서는 감방 안에서 또 다른 감옥 생활을 해야 했던 셈인데, 30여 년의 시간차를 둔 두 사건을 뭉뚱그리는 시인의 결론은 이러하다.

“아무리 너희들이 수많은 감옥들을 세우고/ 그림자도 없는 무쇠같은 벽들을 높이 세워도/ 저 봄풀의 무성한 성욕으로/ 그 연약한 실뿌리 하나로 벽들은 금이 가는 것”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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