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규 시인의 시편들은 내면에서 오래오래 발효한 시적 대상들이 발아하면서 절제된 따뜻함으로 다가온다. 절제의 미덕은 아슬아슬하게 비시(非詩)와 시(詩)의 경계를 넘나들며, 가혹하리라 만치 자신을 채찍질하며 견디는(「견디는 것」), 그 핍진(逼眞)한 여정의 밀도는 도의 수행과 다름없다. 비를 밀어내 자신의 무게를 덜어낸 구름 같은 존재(「비운다는 것」)와 화두를 삼키며 꿈틀대는 목울대를 타고 장강의 설법을 듣는(「막걸리」), 이런 행위 자체가 시의 길이며, 도의 길인 것이다. 드디어 텅 비우고 다시 맑은 물소리를 채우는데(「좌변기」), 물이 아닌 물소리를 채움으로써 그의 묵언수행은 시쓰기와 함께 계속할 것을 약속한다.
한편, 그의 시적 대상들은 세속에서 늙어가고 쇠잔한 것들에 대한 연민을 떠나서 오히려 그 내면의 힘들을 끌어올리는 데 더욱더 일조하고 있다. 가령 “돌덩이처럼 무겁던 살덩이가/ 무르게 풀어,”(「늙은 호박」)지는 무쇠솥 안의 늙은 호박 같은 것이다. 삶의 불볕과 우레와 무서리를 통과한 맷돌호박은 겨울밤을 온전하고 따뜻하게 갈무리한다. “썩는다는 건,/ 돌아갈 길을 찾는 것이”(「모과에 관한」)라는 진술 역시,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사이클에서 사라지는 건 또 다른 현현(顯現)인 것이다.
“시원한 물 한 그릇으로/ 살아지던 때가, 있었던”(「액정사회5」) 아름다운 시절과 곡진한 세상을 꿈꾸는 김종규 시인은, 신생(新生)의 주인공을 보내듯이(「봄, 단상(斷想)」) 앞으로 꽃피울 시편들을 어떻게 기대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각시메뚜기·12 껍질을 읽다·13 늙은 호박·14 모과에 관한·15 틈·16 여뀌꽃·17 수목한계선·18 큰 소리가 나올 법한데·19 143번 시내버스·20 시간·22 회화나무의 시간·23 식당 밥·24 견디는 것·25 비운다는 것·26 먼지들·27
2부
말言·30 몸의 말·31 붉은 통증·32 손에 관한·33 웃음에 관한·34 기억도 늙는 것일까?·35 세월·36 주름의 재발견·37 땀의 발견·38 막걸리·39 연속극·40 비밀의 뒷맛·41 부모 사랑 상조회·42 붉은 노트 두 권·43 전단지 한 장의 무게·44 출근길·45 측면·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