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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짓는 버릇 (시안황금알 시인선 22)
지은이 : 이승욱
출판사 : 황금알
발행일 : 2008년 8월 25일
사양 : 136쪽 | 128*210
ISBN : 978-89-91601-54-3-03810
분야 : 황금알시인선
정가 : 7,000원
지나가는 바람결에 길가의 포도나무가 "설흔 개쯤의 잎을 뒤집어/오래된 농담처럼 슬그머니 웃는다." 포도나무의 웃음을 이승욱 시인은 이렇게 표현한다. 나무의 웃음을 들을 수 있는 사람도 드물 터인데, 이 시인은 그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지천명의 나이에 이르렀다고 해서, 누구나 "날 저무는 들판에 홀로" 서서 "지나간 삶으로부터는 소식이 없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도 아니다. "멀리 소리 없이 번져 오르는 가을 냄새"를 맡고, "건초가 널린 들 숲"을 "참을 수 없이" 달게 맛보는 감수성의 연륜이 이 시집 곳곳에 쌓여 있다. 더구나 "시인이 아닌 시인"의 자각과 달관을 거침없는 가락에 담아 진솔한 목소리로 노래한 시편들은 이 시인의 새로운 변모와 발전을 보여 준다. 한국 현대시의 다양한 양상 가운데서 한 독특한 개성을 우리는 이 시집에서 만나게 된다. - 김광규(시인)

이승욱의 시들은 잘 빚은 누룩을 발효시킨 술처럼 향기롭다. 설익은 관념이나 문학적 실험의 치기는 아예 발을 붙이지 못한다. 고통과 비명에 비벼져서 울혈된 나날의 체험을 거르고 걸러 시를 빚는 까닭이다. 시들은 시종 무심화법으로 일관한다. 애써 하늘의 비의秘意나 생의 절대비밀을 토설하지 않는다. 짐짓 체념과 달관한 듯 무심無心을 툭툭 던지는데 한 꺼풀만 벗기면 그 아래 뼈에 사무친 속울음들이 질펀하다. 그 속울음의 진원지는 무리에서 방출되어 저 혼자의 리듬으로 흘러가는 자의 무주고혼無主孤魂이다. "혼자 타오르는 저녁/혼자 검은 집/혼자 넘치는 술잔/혼자 잠든 식탁/혼자 쌓이는 시간/혼자 흐리는 풍경" 저 바닥에 저 홀로 삭고 무르익은 사내의 속울음이 흐른다. 왜 우느냐고 묻지마라. 무릇 삶이 그러하다. - 장석주(시인)

"……풀밭에 공 줏으러 가서/풀 속에 가난한 메뚜기 한 마리 놀라서 뛰는 것을 보고/고향생각 한다 고향 가고 싶다 고향은 문득 저렇게/놀라서 풀쩍 내 눈앞을 뛰는 거다!"(「고향생각」 1연)
흡! 숨이 멎고, 그만 나는 딱 죽고 싶어진다. 예서 더 없다. 시, 죽음, 절정, 고독 그런 모든 것의 이름이 모인 대폭발. 이승욱의 시 「고향생각」을 절대 남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다. 나 혼자 감춰놓고 심장이 펄쩍 뛰어오르는 놀람교향곡처럼 높은 음감을 떨며 훔치고 싶다. 그처럼 이승욱의 시는 시 곳곳에 그만의 절대언어와 절대자신을 박아 절대음감, 절대순도를 자랑인 줄 모르고 자랑한다.
나에게 이승욱 시인은 그의 첫시집 『늙은 퇴폐』 속의 「꿈이 없는 빈 집에는」이라는 시의 "꿈이 없는 빈 집에는/비스켓 하나라도 바스락거리면/너무 외롭다"의 시인이다. "비스켓 하나라도 바스락거리면" 꿈이 없는 빈 집에는 "너무 황홀한 꿈이 비스켓 속에 타기 때문"의 시인이다. 나 그때 홀로 사는 늙은 처녀였는데 이놈의 비스켓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낮밤 없이 듣느라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모른다. 이승욱의 시를 조심스레 읽어보면 이 시인이 얼마나 감각의 퇴폐와 정념과 환각을 사랑하고 그와 하나 되어 있는지를 곧바로 만난다. 그런데 그런 왕국의 바탕은 절명할 것 같은 외로움, 고독, 뼈저린 가난이다. 이 왕국에서 죽었다 다시 살아, 또 죽었다 다시 살아 여느 누구보다도 그 순도와 향이 유별한 이승욱만의 얼룩꽃을 피워낸 것. 생득적으로 고절孤絶에 사무친 너무 내밀한 한 영혼이 버려지지 않는 나를 들어 바쳐 광막한 우주 허공의 현 하나를 텅, 퉁겨보고 다시 한번 텅, 퉁겨보며 피우는 「한숨짓는 버릇」 「혼자 흔들리는 나무」 등의 시편이 그런 아름다운 얼룩꽃들이다.
이런 문답도 있다. "넌, 안 그러니?//난 평생 혼자 산 것 같다." (「무주고혼」) 또 <시인의 말> 첫 문장은 "평생 혼자 산 것 같다"로 시작한다. 자신의 말의 첫 구를 폐일언하고 평생 혼자 산 것 같다고 갈길 수 있다니, 그 참말의 참혹이 놀랍고 벙벙하기만 하다. 혼자 노는 하염없는 고독의 자화상, 이승욱의 시를 읽으면 무주無住가 유주有住인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외로운 주소를 슬픔에 젖어, 또 화려한 사치에 젖어 맴돌게 된다. - 이진명(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