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자(隱者) 최명길 시인, 백두대간에 들다!
- 자연을 향한 외로운 존재의 사유(思惟)
1. 외로움 속에서의 자연과의 교감
최명길 시인의 초기 시세계는 외로움이 주류를 이룬다. 첫 시집 『화접사』(1978)를 비롯하여 『풀피리 하나만으로』(1984) 『반만 울리는 피리』(1991) 등에서 외로움의 정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뚜렷이 나타난다. 사실 외로움이란 것은 그에게만 유별난 것은 아니다. 인간 존재에게는 생래적으로 외로움이 의식 속에 자리를 잡고 있고, 왜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를 자신에게 물을 때 ‘텅 비어 있음’의 느낌은 점점 커진다. 특히 최 시인에게는 법수치 같은 벽지 학교에서 홀로 지낸 체험이 외로움에 침잠하게끔 한 요인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그는 외로움에 휘둘리고 있지는 않다. 외로움 속에서 자연의 사물들이 전하는 내밀한 소리를 들으려고 하고, 사물들의 신비한 의미를 천착하고자 했다. 첫 시집 해설에서 이원섭 시인이 “그의 시는 그 소재의 배후에 깔린 신비까지도 들추어 보인다”라고 한 것이라든지, 『반만 울리는 피리』에서 박이도 시인이 최 시인을 “침묵과 고독을 바탕으로 어둠 속에 타오르는 촛불과 영혼을 기르는 시인”으로 평가한 것도 외로움 속으로의 침잠만이 아니요, 외로움을 통해 사물과의 교융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2. 명상 속에 귀 기울이는 만물교융의 세계
외로움 속에서 자연의 내밀한 울림에 귀를 기울이고 교감을 하는 시인의 태도는 ‘명상시’라고 이름 붙인 『바람 속의 작은 집』(1987)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달한 느낌이다. 이 시집은 시인이 당시 산간 오지라고 할 수 있는 법수치라는 곳에 분교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쓴 시들이 주를 이룬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하려고 한 시인은 이 시기에 이르러 그야말로 物我一體를 이룬다. 이 시집 「자서」에서 ‘이슬’에 대해 기술한 내용을 보면 얼마나 그가 대상과 밀착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슬의 일생을 지켜본다는 것은 곧 나를 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물상을 보는 것이다. 실로 이슬은 하나의 우주로서 외형으로는 단순한 물막에 지나지 않으나, 그 내면으로는 온갖 색조가 타오르고 있다. 먹구름과 실오라기 같은 꿈과 폭포의 난폭성이 이 속에 깃들어 있고, 얼어붙은 대지의 멈춘 심장을 일깨우는 맑은 물소리와 청명한 가을 하늘의 오묘한 푸르름이 이 속에 잠들고 있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고 지축을 찢던 굉음을 들을 수 있고, 폭설로 오들오들 떨어야 하는 어린 짐승들의 悲感과 빙점 이하나 비등점 이후의 물의 수난사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은 이 여린 물방울 속에 다만 존재의 비밀로 담겨 있다. 존재의 비밀로 침묵의 절규를 하고 있다.
( 최명길, 「이슬과 시」, 『바람 속의 작은 집』 ‘자서’ 중에서 )
3. 극미묘의 세계에 대한 佛家的 사유
최명길의 시는 시집 『콧구멍 없는 소』(2006)에 이르러 그 깊이를 더한다. 『은자, 물을 건너다』(1995) 이후 11년 만에 출간된 시집이다. 여기 수록된 시들을 보면 사물들의 내밀한 울림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외롭지만 자유로운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의지가 한층 뚜렷해진다. 이것은 그가 생각보다는 사유에 의지하여 사물을 바라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유는 생각의 차원을 넘어선다. 생각이 의도적이라면, 사유는 무위의 경계에 있다. 그는 극미묘한 존재들에 대해 감각의 촉수를 들이대고 사유를 했고, 사유를 위해 많은 불면의 밤을 보냈다.(최명길, 「나의 삶 나의 문학」 중에서) 자유로운 존재에 대한 그의 갈망은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콧구멍 없는 소」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나는 콧구멍 없는 소다. 누구도
내 코를 꿰어 끌고 갈 수 없다.
채찍을 휘둘러 몰고 갈 수도 없다.
나는 다만 콧구멍 없는 소
홀로 노래하다 홀로 잠든다.
구름 쏟아지면 쏟아지는 구름밭 속이
폭풍우 몰아치면 몰아치는 소용돌이
그 속이 바로 나의 집 나의 행로다.
내 너무 괴로워 못 견딜 때엔
하늘을 향해 크게 한 번 으흐흥 하고
울부짖으면 그만
나는 한 마리 뿔무소다.
- 「콧구멍 없는 소」 전문 -
‘콧구멍 없는 소’는 자유의 상징이다. 콧구멍이 없으니 코뚜레를 낄 수가 없고, 그러니 소는 주인에게 구속되지 않는다. 거칠 것이 없이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런데 시인은 “나는 콧구멍 없는 소다”라고 한다. 시의 서두에 제시되는 이러한 선언적 어조는 그가 얼마나 아무런 구애 없이 자유롭기를 바랐는가를 알려준다. 그의 소원은 홀로 있으면서 세상 모든 일에 집착을 버리고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뿔무소가 되는 것이다. 물론 그 행로가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구름밭이나 소용돌이 같은 역경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속을 ‘나의 집 나의 행로’로 받아들인다. 괴로움도 한 번의 큰 울부짖음으로 털어내려 한다. 자유로우려면 그 정도의 역경은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 시인의 각오이자, 삶의 태도이다.
4. 산시 백두대간- 구도자의 길
『하늘 불탱』 말미에 실린 ‘시인의 산문’에서 “내 시의 길은 예술적 행보가 아니다. 구도의 행각이다. (…) 구도자의 길을 따라나섰던 두타행이었다”라고 한 언급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시인의 두타행의 절정은 사십일 간의 백두대간 종주였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금강산 마산봉까지 1240㎞의 대장정이었다. 산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 산을 찾는다며 누구보다도 산을 좋아했던 그는 이때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채 산시일체의 경지를 체험했다. 그 산행의 결산 『산시, 백두대간』(황금알, 2014)이 그의 死後 유고시집이 되어 출간되었다. 아마도 이 시집은 우리나라에 산재하여 있는 거의 모든 산이 시의 소재가 된 전무후무한 시집이 될 듯하다. 비록 그는 칠십오 세로 삶을 마쳤지만, 저 세상에서도 외로움을 만끽하며 산의 품속에서 시를 읊조리고 있을 것이다. 다음의 최명길 시인의 말이다.
백두대간에 다녀왔다. 산에서 먹고 산에서 낮과 밤을 보내기를 만 40일, 그 일은 모험이었고 충격이었다. 산이 있어 나는 산에 올랐고 산맛에 흠뻑 취했다가 돌아왔을 때에는 거의 탈골지경이었다. 내 산생활 40일은 산과 시와 한 몸을 이룬 거친 산인의 삶이었다.
나는 백두대간에 생명을 걸었었다. 산행을 마친 후 내 몸의 변화는 끔찍했다. 체중은 9㎏가 줄었었고 발목과 손목은 부어올라 달포 간을 꼼짝할 수 없었다. 훑고 지나간 상처자국은 온몸을 채웠다. 뱃구리가 달라붙어 음식을 먹어도 나올 줄 몰랐다. 내 몸 속의 군살은 모두 타버렸다. 모두 타 에너지로 바뀌어 오로지 걷는 데만 쓰여졌다. 나는 살가죽만 남은 쭉정이가 돼 있었다. 삿기까지 모두 타버렸는지 마음마저 텅 빈 듯 했다. 나는 한없이 조촐해져버렸고 아무 생각이 없었다. 바라는 것도 최소한으로 줄어들어 한 모금 샘물과 한 줌 쌀이면 족했다. 나를 지탱하자면 그 둘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감정 또한 매우 단순하게 변해 먹을 것 앞에서만 기쁨이 솟아났다. 어떤 차디찬 극점에서 나는 내 호흡의 끝을 보았으며 생명이 다름 아닌 숨결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굶주려 뼈만 앙상한 한 마리 산양이 거친 암릉을 기어 올라가고 있었지만, 그게 바로‘나’였다. 회오리바람처럼 휘몰아치던 나, 그 ‘나’는 그렇게 돼 있었다. 무슨 광기에 휘둘려 그랬는지 모르겠다.
백두대간은 우리 국토의 등뼈다.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산봉우리를 따라 하늘금을 그어본 것이 백두대간이다. 따라서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마치 거대한 나무처럼 동서남북에 걸쳐 수많은 가지를 뻗어 지맥을 거느리고 뿌리를 내린 것이 우리 국토다. 말하자면 백두대간은 이 땅의 생명의 본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을 관통하는 혈맥이다. 이 땅의 삼라만상은 백두대간의 생동기운을 받아 여기 이 자리에 존재한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백두대간 종주에 솔깃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산행은 첫날부터 고행이었다. 감히 말하거니와 나는 백두대간이라는 화두를 배낭 속에 집어넣어 걸머지고 백두대간을 향해 들어갔던 두타행자였다. 산을 구걸하는 걸신행각이었다 할까? 나는 산에 집중했고 다치지 않으려면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집중만이 내 생명을 붙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런 가멸찬 행로는 내 생애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나는 오로지 걸었다.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옮겨가자면 걷는 방법이 유일했다. 걷는 데만 온몸을 모았고 나를 바쳤다. 춤을 추듯이. 그러다 보니 마음 또한 모아졌고 뜻밖에 이런 산노래들이 튀어나왔다. 어쩌면 이것들이 튀어나오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산의 영혼과 내 영혼이 맞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산봉우리에 쭈굴티고 앉아 시를 읊조리거나 시의 씨앗을 주워 담았다. 금방 된 것도, 지난 11년여 동안 다독여 깎아 세운 것도 있다. 여기 시 141편은 그렇게 해 탄생한 것이다. 141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금강산 마산봉까지의 중요 산봉우리 숫자이기도 하다. 평소 산 하나를 산경 한 권이라 생각했었는데, 산경 한 권씩을 받들고 넘어 설 때마다 한 꼭지씩의 시가 버섯처럼 피어 나온 셈이다. 행각 중 나는 시를 얻었고 산은 시를 주었다. 산시 141편. 이들에 더해 ‘한라’와 ‘백두’, 그리고 서시 두 편까지 모두 145편의 시와 ‘산경’ 88(…).
이 땅의 산기운으로 태어나 이 땅의 산에 태를 묻은 자로서 그것들은 이 땅의 산에 대한 경배요 작은 헌사라 해도 좋을 것이다.
죽령에서는 왜 그렇게 눈물이 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흐르고 흐르던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눈물 뒤에 들려오던 그 청아한 소리는 또,
시여. 내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이 땅의 산향이나 가득 담겨있기를!
산시 백두대간 그 산의 춤이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