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아정에 이르러 드디어 혀는 감미로운 것을 탐닉하는 존재가 아닌 세상을 절단내는 날카로운 칼과 이빨이 되었다. 그의 오선지에는 아름다운 선율이 아니라 출처를 알 수 없는 온갖 불협화음들이 흩어져 난자당하고 시인은 ‘무수한 주름을 가진 건반을 더듬는 난독증의 연주자’가 된다. 그의 첫 시집 그 어디에도 화해를 위한 몸짓은 없다. 이것이야말로 갈수록 미궁으로 가라앉고 있는 오늘의 세상과 대적해야 하는 시인이 견지해야 할 적절한 전투태세일 것이다. 그 날선 치열성을 양아정의 시에서 만났다.
- 최영철(시인)
사물이 가진 본래의 가치와 의미를 파괴하고 분해하여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의 것으로 만들어내고자 하는 양아정의 언어는 그리 쉽게 읽히는 종류의 어법은 아니다. 시적 대상과 이미지 사이의 간극이 큰 탓에 더러 낯설고 생경하다. 그러니 양아정의 언어는 쉽게 읽히고 쉽게 잊히는 종류가 아니라 오래 곱씹고 뜯어볼 만한 종류의 어법이고 언어이다. 그러고 난 후에야 비로소 그 속에 재창조를 위한 파괴가 가져다주는 위배와 죽음의 어두운 향기가 스며있음을 알게 된다. 죽음의 그림자를 매단 인물과 풍경들이 시 속에 빈번하게 등장하여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그렇게 이해와 불신과 증오가 뒤엉키는 연유는 아마도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파괴와 죽음의 과정, 마땅히 치러야 할 필연적인 과정으로 읽힌다.
- 김형술(시인)
양아정 시인의 시편들은 허공에 못을 박고 절벽을 써버린 한 칸의 자유를 통해, 아비규환과 지옥도를 보여준다.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전사戰士들처럼 검은 시간을 뚫고 하나의 섬광으로 종횡무진 한다. 하여, 생을 지탱하는 건 제 몸에 상처를 두들기며, 내 살을 내가 발라먹고 살아야 하는 숙명에 도달하면서, 상처는 오로라로 빛난다. “밀봉된 아이가/ 빈 깡통 속에 갇혀/ 구름 계단을 밟고/ 공중을 헤엄치며/ 시간의 옹벽을 쌓는다/ 문 없는 문을 닫”는 것처럼, 그는 끊임없이 무문관無門關을 향하여 온몸을 전사轉寫한다. 각혈로 얼룩진 시의 터널을 지나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천 개의 입술을 주렁주렁 매단 은밀한 사원에 도착한다.
- 김영탁(시인·『문학청춘』 주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