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丁酉年) 첫날, 거제 둔덕의 산방산 정상에서 해돋이를 보며 누군가에게 한 약속이 떠올랐다. 합장하며 해에게 다짐했다.
“그래, 내가 하지 않으면 이 일을 할 사람은 정녕 없다. 오늘부터 일단 노트에 점이라도 찍어 보자.”
나는 평소 운명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시를 쓰는 것도 운명, 소설을 쓰는 것도 운명이라고…….
십여 년 전 첫 시집을 내면서, ‘시인의 말’에서도 언급했는데, 어머니가 호롱불 밑에서 바느질 하시며 들려준 우리 마을의 보도연맹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내가 커서 언젠가는 글로 한 번 써봐야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어릴 적 그 당돌하고 엉뚱한 생각이 오늘의 의종과 정서에 대한 소설을 쓰게 될 줄이야. 이건 운명을 넘어 일종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어릴 적부터 눈만 뜨면 내 고향 피왕성(避王城)을 바라보며 자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행인 것은 나의 기억력이다. 이상하게도 의종에 관해서 들은 이야기는 하나도 기억에서 사라지지를 않았다. 심지어 내가 습작의 시기에 처음 쓴 시가 ‘피왕성’이었으니까.
제1회 ‘의종제(毅宗祭)’를 지낼 때 축문(祝文)도 내가 지었고, ‘의종이 3년간 머물다 간 둔덕을 다시 보자’는 수필을 쓰기도 했다. 전해 내려오는 전설들을 하나하나 적고 기록하면서 내 스스로 의종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주목(朱木)의 옹이처럼 남아 있는 지명들을 돌아보면서 나는 847년 전의 개경의 송악산으로, 거제의 우두봉으로 내달렸는지도 모른다.
또한, 역사 속에 깊이 잠들어 있던 정서(鄭敍)를 흔들어 깨워서, 그가 유배를 살던 오양역참(烏壤驛站) 인근에서 거문고를 타며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완성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말하자면, 의종의 둔덕 기성에서의 3년간 쌓인 한(恨)과, 정서의 오양역 배소(配所)에서의 13년 8개월의 한을, 의종과 정서의 입장에서 썼다.
한편으로, 구전으로만 전해오는 이야기 중에 의종을 모시고 거제 땅으로 내려왔다는 빈정승(賓政丞), 반정승(潘政丞), 신정승(申政丞) 등에 관해서는 정확한 역사적 기록이 없고, 다만 100여 년 전에 거제 유학자 명계(明溪) 김계윤(金季潤) 선생의 글에서 세분의 정승이 의종을 모시고 내려왔다는 내용이 언급돼 있는 것이 전부다.
후손들이 현재 살고 있는 성씨는 기성 반씨(潘氏)와 수성 빈씨(賓氏)이고, 아주 신씨(申氏)는 거제에 후손이 살고 있지를 않아 확인할 길이 없다.
아무리 소설이지만 근접한 역사 속의 인물들을 찾아내는 것도 필자의 능력의 한계라고 본다. 후학들이 나머지 부분을 찾아서 이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오늘의 이 역사소설을 탈고하기까지 줄곧 조언과 격려로써 부추겨 주신, 나의 대학 스승이신 김인배 교수님께 깊이 감사드리며, 각종 자료를 보내주신 고전연구가 고영화 선생님, 그밖에 의종에 얽힌 전설을 알려주신 지역 어르신들과 현지답사를 함께하며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신 거제수목문화클럽회원 분들께도 아울러 깊은 감사를 드린다.
정유년(丁酉年) 끝자락, 남은사랑(嵐垠舍廊)채에서 저자 씀.